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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대피라미드의 과학적 고찰_청동기 시대에 세운 대피라미드 건축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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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피란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180.85), 작성일 13-03-06 00:09, 조회 6,432, 댓글 0

본문


기자 대피라미드의 과학적 고찰 

 

사진/ Wikimedia Commons 

 

 

 



 

퐁피두 센터와 피라미드



 

1996년 11월 8일치 영국의 타블로이드판 일간지 <더 인디펜던트>의 건축 관련 지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건축물이 지탱되어야 하는가?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 군처럼 수천 년 동안 서 있어야 하나, 아니면 현대 예술센터의 경우처럼 25년도 채 유지하지 못해도 되나? 이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해보자. 왜 사람들은 건축물이 수천 년 동안 유지되기를 바라나? 단지 몇 년 동안만 유지되는 건물에는 감리 기간이나 건축 기간, 자금이나 기술 등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 내용은 당시 건축된 지 25년밖에 안된 퐁피두 센터에 문제가 생겨서 문을 닫고 600여억 원을 들여 보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빗대어 지적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집트 기자고원에 있는 대피라미드를 비롯한 피라미드 군이 수천 년을 유지되어온 것에 비하면 겨우 갓난아기에 불과한(원문에서는 태아(embryonic)로 표현했다) 퐁피두 센터에 60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보수 작업을 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인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현대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옹호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대피라미드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퐁피두 센터는 연간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10배가 넘는 방문객의 등쌀에 시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다음과 같이 더욱 평가절하한다.

 

“대피라미드는 매우 장엄한 창작물이다. 하지만, 파라오의 무덤으로 만들었는데도 그 시신을 도둑맞았고, 또 외장재로 입혔던 표면의 거울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석회암도 모두 벗겨졌다. 대피라미드와 같은 고대의 유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당시에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을 거야’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말은 곧 오늘날에는 우리가 그런 것을 건축할 수 있는 기술을 망각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

... 사실 오늘날 건축가들과 공학자들 그리고, 시공업자들이 그런 건축물을 짓지 않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당장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건축을 하도록 숙련되었다. 또, 단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건축을 할 뿐 아니라 대량으로 건축을 하고, 피라미드에 비해서 훨씬 싸게 건축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축 예산은 국민총생산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것도 수많은 건축에 쪼개어 써야 하는 입장이다. 대피라미드를 만든 고대 이집트 쿠푸왕 시절에는 슈퍼마켓이나 쇼핑센터도 없었고, 레스토랑, 복합 영화 타운, 기차역, 공항 터미널, 그리고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것도 없었다. 이처럼 지어야 할 건물도 별로 없었지만, 고대사회는 전제국가체제였기 때문에 피라미드와 같은 초대형 건물을 수세기에 걸쳐서 건축하는 것은 그 당시에 특별한 일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행사였다.“

 

내가 이 기사를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여기서 필자가 제기한 바와 같이 과연 기자 대피라미드가 현재의 관점에서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논점에 대해 앞으로 철저히 규명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첫째, 기자 대피라미드의 외장으로 붙어 있던 석회암 판재들이 건축의 끝마무리가 시원찮아서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 뜯겨져 나간 것일까?

 

둘째, 현재의 우리 기술 수준에서 돈과 행정적 지원만 있으면, 대피라미드와 같은 것을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인가?

 

셋째, 그 건축에 적용된 건축공학적 기술력을 기사에서 처럼 폄하할 수 있는 것인가?

 

  


기자 대피라미드 건축의 경이



 

<더 인디펜던트>의 기사에서 지적하듯 현재의 대피라미드는 외장재가 다 뜯겨진 상태다. 원래의 대피라미드는 흰빛의 투라 석회암을 매끈하게 가공하여 광택이 나도록 한 외장재로 덮여 있어 100 킬로미터 밖에서도 빛나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외장재가 다 벗겨진 것이 인디펜던트의 기사가 말하듯이 건축이 불완전했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다! 그 필자는 몰라도 너무 모르고 기사를 썼다. 대피라미드의 외장재들은 카이로 시내를 폐허로 만든 여러 번의 대지진에도 끄떡없이 거기 붙어 있었다. 그런데, 9세기 이후 화약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인근의 카이로 시민들이 양질의 투라 석회암을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 둘씩 뜯어가기 시작했고, 1301년의 대지진으로 카이로의 건물들이 모두 무너지자 새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대량으로 뜯어가버렸던 것이다. 대대로 물려줘야 할 인류의 값진 문화 유산을 당장 살 집을 짓기 위한 세속적인 이유로 여지없이 훼손해버린 셈이다.

 

대피라미드를 대할 때 우선 와닿는 경이감은 거기에 사용된 돌들의 개수와 총무게에 있다. 210단까지 쌓은 대피라미드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약 230미터 길이고, 절석은 높이 1미터, 폭 2미터에 길이는 여러 가지다. 이 중에서 가장 작은 돌의 무게는 약 2.5톤 정도이고, 이런 돌들이 230만 개 이상 쌓여 있어 총무게는 600만 톤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류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절대 군주가 10만 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나일강 건너 수 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 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 이 돌들을 20여 년 동안 운반해 쌓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거석들을 1톤당 몇 명이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토목공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토목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 고도의 기술이 제공된 아래에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류 고고학자들의 이른바 ‘정설’은 고대 그리스 사학자 헤로도토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한 것인데, 헤로도토스 시대에도 이미 대피라미드는 최소한 2000여 년 전의 고대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헤로도토스의 추측은 그 개인의 견해일 뿐 어떤 믿을 만한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헤로도토스가 말한 식으로 일을 했다 하더라도 돌을 자르고 운반하여 쌓는 데 투입된 인원 외에 훨씬 많은 부대 인원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헤로도토스가 말한 대로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 : 1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또, 이들 전부를 먹이기 위한 식량 조달, 운송, 요리사들, 그리고 그들을 재우기 위한 숙박 시설의 건설자, 피복(被服)의 조달자들, 총무, 노무, 재무관리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인원은 5배가 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얼마나 충분히 목재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 충분한 목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이는 돌의 운반에 못지 않는 또 하나의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2.5톤은 제일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며, 이것은 카이로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아스완에서 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무거운 돌들을 그토록 먼 거리까지 운반할 수 있었을까? (이어짐)


(이어짐)

 

 

 

 


기자 대피라미드에 구현된 초정밀도



 

기자의 대피라미드 군에 대해 이집트학 학자들은 고대 왕권통치의 특별한 구조 때문에 건설이 가능했다고 하면서 인력을 얼마 동원해서 몇 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산술적인 계산을 하는 데에만 열심이다. 하지만 건축공학과 토목공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피라미드가 단지 돌을 적당히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오늘날의 건축술에 버금가는 고도의 기술이 거기에 적용된 것이다.

 

이 부분은 최근까지 거의 강조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우리는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건축물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이런 놀라운 고도의 기술을 애써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피라미드를 건축한 문명의 수준은 놀랍다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적인 수준임을 깨닫게 된다.

 

19세기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특히 고대 이집트학의 선구자였던 플린더스 피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은 자신이 직접 측정해보고서 기자 대피라미드에 적용된 정밀도가 당시에 사용되었을 측정용 막대자가 밤낮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하는 한계를 넘어선 것임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그는 그 이후 우리가 아는 한 대피라미드보다 더 정밀한 건축물이 건설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정밀한 건축물이다. 어느 정도로 정밀하기에 그런 얘기를 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피라미드 밑변 길이는 230.3미터에 대해서 최대 4.4센티미터의 차이만을 낼 뿐이다. 그 정밀도는 1/5000 즉, 0.02% 미만이다. 또, 피라미드 밑면의 네 모서리는 거의 직각에 가깝다. 최근에 측정한 바에 의하면, 밑면의 남동쪽 모서리는 89도 56분 27초, 북동쪽 모서리는 90도 3분 2초, 남서쪽 모서리는 90도 0분 33초, 북서쪽 모서리는 89도 59분 58초로서, 90도에 대해서 최대 변위의 오차는 0.07% 이내이다.

 

전체 건물의 방향을 보면, 기자 대피라미드는 그 네 밑변이 각각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다. 우선 북쪽 변은 2분 28초 서쪽 방향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변은 1분 57초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변은 5분 30초 북쪽으로, 서쪽 변은 2분 30초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수준이 어느 정도로 정밀한 것인가를 오늘날의 초정밀 건축물과 비교하려면 천문대와 비교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일간지 인디펜던트지 기사의 주장과 같이 오늘날 지어지는 건축물이 극도로 정밀할 필요가 없다. 정밀도를 높여서 지으려면 비용이 거기에 대응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실제로 효용 가치 면에서 볼 때 그만큼 돈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극도의 정밀도가 요구되는 건축물이 있긴 있다. 천문대가 바로 그것이다. 국제적인 천문대는 지구의 위도와 경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정밀해야 한다. 특히 시간의 기준이 되는 자오선 방향으로의 정렬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지어진 천문대 중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대가 어딜까?

 

오늘날 전세계 시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 빌딩(Meridian Building)이 아마도 가장 정밀해야 할 건물일 것이다. 이 건물 중앙의 남북을 잇는 선, 즉 자오선이 바로 경도 0도이기 때문에 특히 이 건물의 남북 방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자오선에 대해서 각도 9분이나 어긋나게 지어졌다. 실제로 가장 정밀한 천문대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아니라 파리 천문대이다. 그런데 이 건축물도 자오선에 대해 6도나 기울어져 있다. 기자 대피라미드의 남북 방위는 겨우 3분 정도 어긋나 있을 뿐인데 말이다!

 

이런 정도로 정밀한 건축에서 방위를 결정하는 데, 나침반을 사용할 수 없다. 나침반은 정북을 가리키지도 않을 뿐더러 수시로 그 방향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목적으로 천문용 방위각 측정 장치(Astronomical Alt-Azimuth Instrument)를 사용하는데, 결국 원하는 방위를 구하기 위해서는 로그표를 참고한 계산이 뒤따르게 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런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거의 비슷한 정도의 정밀 측정 장치와 어려운 계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피라미드 밑변의 방위의 정밀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해보았다. 그런데, 밑변의 틀을 잡은 뒤에 진행되었을 건축 과정을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은 난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건축을 할 때 전체 모양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대각선 측량을 한다. 그런데 대피라미드의 경우는 건축 초기에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대피라미드 가운데 존재하는 돌출된 암석이 시야를 가려 대각선 측량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의 정확한 정사각형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울 다름이다. 그 이후에도 건축이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매우 정밀한 측량을 해서 마지막에 피라미드가 오늘날 볼 수 있듯 대칭적인 모습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 대해서 현 고고학계에서는 “그 당시 사용이 가능했을 도구와 방법만으로 그런 정밀도를 성취했다는 것은 오직 그와 같은 고도의 정밀도를 달성하기 위한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뒤따랐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대단한 평가인 듯하지만, 실은 대피라미드가 기술이 아니라 기능으로 그렇게 정밀하게 만들어졌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대피라미드 밑변이 4.4센티미터의 벗어남만을 허용한 부분에 대해서 피트리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측정 장비 자체가 이 정도의 오차를 피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건축자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한 치의 착오없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그런 고도의 정밀도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전문적인 표현을 쓰면 건축시에 허용 공차(公差)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긴데 건축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억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이집트인들을 슈퍼맨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대피라미드 건축에 고도의 정밀도를 갖는 측량 기구가 동원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대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푸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 전문가 중에서 그 당시 오늘날에 버금가는 측량 장비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대영박물관의 고대 이집트 담당관을 20여 년 간 역임한 에드워즈(I. E. S. Edwards) 박사는 “모서리가 완벽한 직각이 되도록 지어지는 현대 건축물들은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정밀 측정 장치가 피라미드 건설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단지 숙련된 노동력과 단순한 도구에만 의존해서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을 것이란 기존 주장을 세계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이집트 전문가 중 한 사람이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대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초고속 원형톱?



 

기자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은 전체적으로 보아 특별히 고려된 구조이다. 대부분이 인근의 석회암을 채석해서 만들었지만, 이 방 만큼은 먼 아스완에서 날라온 수십 톤의 화강암들을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도의 정밀도가 이른바 석관을 비롯한 ‘왕의 방’ 내부를 꾸미는 데 사용된 모든 화강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대체 이런 석재 가공에 어떤 도구가 사용된 것일까?

 
» 기자 대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한 가운데에 있는 구조물이 왕의 방이다.
피트리는 1884년 그의 논문에서 여기에 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 의해 남겨진 문자들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고, 이제 많은 학자들이 돌에 각인된 이런 문자들을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집트인들의 고대 지식과 기술을 나타내는 물질적 증거에는 관심조차 표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크리스토퍼 던(Christopher P. Duun) 이라는 공구 제작자는 ‘고대 이집트의 진보된 기계 가공술(Advanced Machining in Ancient Egypt)’이라는 논문에서 ‘왕의 방’에 사용된 43개의 들보를 다듬은 기술을 검토했다. 그리고 나서 “비록 고대 이집트 시대에 어떤 간단한 바퀴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화강암 들보에 나 있는 기계 자국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적인 성취가 당시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아마도 직선톱과 둥근톱, 튜브형 드릴, 그리고 놀랍게도 오늘날 선반과 유사한 장비를 썼음이 틀림없다.”23)라고 주장했다. 직선톱과 둥근톱, 그리고 드릴과 선반……. 이것들은 오늘날 재료 가공에 사용되는 주요 공구들이다. 정말로 이런 것들이 당시에 사용되었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들이다.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일까?

 

하지만 이와 비슷한 결론은 이미 오래 전에 플린더스 피트리에 의해서도 내려졌다. 그는 대피라미드의 석관을 자세히 조사한 후 그것을 가공하는 데 여러 종류의 톱들이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는 이 석관의 외부가 최소한 길이 2.44미터 이상되는 청동으로 만든 직선톱에 의해 잘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이것이 만들어졌을 시기는 신석기시대를 막 벗어난 청동기시대이므로, 이처럼 구리가 사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점이 그를 고민에 빠트렸다. 청동기로는 단단한 화강암에 흠집내기조차 힘들다는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톱날 끝에 다이아몬드가 박혔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 사회에 다이아몬드가 사용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이런 가설을 1884년 관련 학회에서 주장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에 직면했다.

 

사실 더 어려운 문제는 화강암 석관을 파낸 기술의 수준에 있었다. 이 작업은 석재를 암반에서 잘라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피트리는 이런 작업에 원형톱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실제로 왕의 현실에 사용된 화강암 중에서 이런 원형톱의 나선형 톱날 자국처럼 보이는 자국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나선 톱날 자국에서 터무니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조사해본 바로는 회전톱의 1회전에 2.5센티미터를 파고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가공은 오늘날의 현대적인 드릴을 사용해서 사암이나 석회암과 같이 무른 암석을 가공할 경우에도 어려운데, 화강암과 같은 단단한 돌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피트리는 이런 가공을 수작업으로 했을 때 1톤에서 2톤 정도의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아무도 지금까지 이것을 이론적으로나 실험적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던도 당시에 화강암과 같이 강한 암석을 가공하는 데에 청동기만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라미드와 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이집트인들이 채석해내고, 놀라울 정도의 정밀도로 절삭해낸 수백만 톤의 석재들은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믿던 것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더 진보한 문명의 일단을 드러내 보여준다. 지금까지 수백만 톤의 돌들이 청동제 정(chisel), 까뀌(adze), 그리고 나무망치와 같은 원시적인 손작업 도구들로 채석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절대 이런 것들로 채석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담금질로 강화된 청동기로도 화성암을 다듬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특히 화강암 표면을 문질러서 윤기를 낸 기술은 이런 원시 손도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청동기가 아닌 더 강한 재질의 공구가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보석이 박힌 청동기? 어쩌면 석관은 드릴이나 회전톱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보석이 박힌 청동기로 조금씩 쪼아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화강암 표면을 윤기나게 가공하는 데에는 연마제와 같은 것을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작업을 통해 관의 내부를 모두 파내고 다듬었다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와 광신적인 몰두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외에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지 않은가?

 
» 피라미드에 쓰인 석재. 출처/ Wikimedia Commons
실제로 1883년 플린더스 피트리가 자신의 논문을 대영 인류학회(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에서 발표했을 때 많은 참석자들이 대안을 제시했다. 존 에반스(John Evans)라는 학자는 다이아몬드가 붙은 공구를 쓰지 않더라도 금강사와 같이 충분한 강도를 갖는 연마제를 사용하면 구리나 뼈, 목재로 된 원통형 드릴로도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런 드릴로 가공할 때 구멍 안쪽 벽면을 따라서 홈이 파일 수도 있음을 간단한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실험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멍을 뚫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한편, 같은 시대의 라우(C. Rau) 박사는 드릴의 끝에 부싯돌을 끼워서 실험을 했는데, 무른 암석의 가공에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섬록암(diorite)의 가공은 이런 식으론 불가능해서 연마제로 수정가루를 사용하여 나무 드릴로 가공했다. 하지만, 그 가공 속도는 2시간 동안 겨우 0.2밀리미터를 가공했을 뿐이다.

 

화강암 관을 파낼 때 이런 식으로 손으로 회전시키는 드릴과 연마제를 사용한 것일까? 그리고, 이런 구멍을 여러 군데 뚫어서 속을 다 파낸 다음 다시 연마제로 관의 안쪽 벽을 다듬어서 편평하고, 반짝거리도록 연마했을까? 누군가 그 관 한 개를 만드는 데 평생을 다 바쳤다면 가능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관이 한 장인(匠人)이 평생을 바쳐서 공을 들일 만큼 중요한 어떤 행사에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 비교적 손쉽게 그런 가공을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이 존재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